이해없는 세상에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진은영,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기를 잃게 하오

당신은 시들었고 죽어가지만

내가 일부러 고통을 주려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난 죄책감을 느끼지 않소

내 생리가 그러하오

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기를 잃게 하오

내가 숨 쉴 때마다 당신은 무르익었고 급히 노화되었고 마침내 썩어버렸지만

 

지금도 몸에서 흘러나오는 호르몬을 억제할 수가 없소

나는 자살할 수 있는 식물이 아니오

당신한테 다가갈 수도 떠날 수도 없었소

단지 관심을 끌고 싶었소

 

김이듬, 정말 사과의 말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내게 금빛 은빛으로 수놓인
하늘의 천이 있다면,
밤과 낮과 어스름으로 물들인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허나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윌리엄 예이츠, 그는 하늘의 천을 소망한다

그냥 너가 죽지 말래서 사는 거다.

2015.01.26

그냥 지금 자살해야겠다. 너무 괴롭다. 진짜 너무 많이 괴롭고 왜 사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렇게 괴로우려고 사는 거면 그냥 살기 싫고 딸 같은 것도 낳기 싫다. 사랑도 필요가 없고 그냥 자살하면 되는 것 같다. 시 같은 것도 쓰기 싫다. 돈 같은 것도 벌기 싫고 음식 같은 것도 먹기 싫다. 그냥 너가 죽지 말래서 사는 거다.

 

김승일, 1월의 책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나비야.

언젠가 너한테 물었잖아. 넌 왜 별칭을 나비로 했느냐고. 네가 말했지. 나비는 세상 모든 이름 없는 고양이들의 이름이라고. 그냥 길 가는 고양이에게 나비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들이 좋아서 나비라고 했다고. 화를 내면서, 악을 쓰면서 나비야, 나비야 라고 하진 않잖아, 라고. 그래서 나도 너를 부를 때 나비야, 나비야, 하고 어쩐지 다정하게 불렀던 것 같아.

나비 너는 내가 행복하게 살 거라고 했지.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고. 마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처럼 확신을 담아서 말했지. 그렇게 말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어. 너는 네가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람이었는지 상상하지 못할 거야. 그 사실이 항상 기쁨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조건에서 굴린 구는 영원히 구른다.

 

언젠가 네가 한 말을 난 종종 떠올렸어. 영원히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상상했어.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잇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너희가 내게 줬던 시간과 마음을, 나는 잊을 수 없고 앞으로도 잊지 않을 거야. 잘 지내.

 

최은영, 모래로 지은 집

풍문처럼 떠도는 생은 없다고 믿는다

허공에 한번 피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말하자면 우리가 어젯밤 귀를 맞대고 들었던 어느 섬나라 재즈 가수의 노래와 그 술집을 가득 메웠던 웃음소리들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에게 던진 캐치볼 같은 고백과 가까스로 세이프 한 역전 주자처럼 뿌듯하게 부푼 마음들 이것들이 하늘로 올라가 더러는 백색왜성이 되고 더러는 붉은 울음을 긴 꼬리로 흘리며 이 땅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는 생각 이런 상상마저 우주 한쪽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고 느끼는 밤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이국의 여자 귀신을 믿게 되는 것이다

 

  필리핀의 한 낡은 호텔에는 여귀가 산다 언제부터 그가 끄물거리는 복도의 전구 빛을 양탄자 삼아 떠돌았는지 알 수 없다 잃어버린 온기를 찾는 것인지 외로움이 깊으면 겁이 되는 법인지 거미줄에 걸린 양 이 행성에서 체크아웃하지 못하고 이방인의 곁을 맴돈다 "수음으로 시간을 달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라고 속삭여주거나 "무명 극단의 '나무 1'이 되고 싶다"라고 일기를 적는 이방인의 겨드랑이를 밤 내 데워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중에 피어난 상처들에게 별자리의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다 땅과 하늘을 오가는 바람의 따뜻한 혈맥

 

  너는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다

 

  풍문처럼 떠도는 생은 없다고 믿는다

 

이현호, 매음녀를 기억하는 밤 - 부동은 또다른 흔들림을 위한 단잠에 불과할 뿐

 

이 시의 부재는 이연주의 「신인의 말」(『작가세계』1991년 가을호 별권)에서 인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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