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없는 세상에서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믿을 수 있는 나무는 마루가 될 수 있다고 간호조무사 총정리 문제집을 베고 누운 미인이 말했다 마루는 걷고 싶은 결을 가졌고 나는 두세 시간 푹 끓은 백숙 자세로 엎드려 미인을 생각하느라 무릎이 아팠다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뜨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미인은 식당에서 다른 손님을 주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의 솜털은 어린 별 모양을 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은 밥을 먹다가도 꿈결인 양 씻은 봄날의 하늘로 번지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아둔 열(熱)들을 피하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던 것이었다

 

박준,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나의 병명을 아무도 모른다

나는 사랑을 유예한다. 잠든 사람이 반드시 꿈을 꿀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꿈을 꾸는 사람은 대부분  잠들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살아 있지도 않는 내가 잘사냐고 너에게 묻고 , 그러니 대답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 덜 아프다는 것이 나아졌다는 것으로 착각되는 일.  번화한 도시의 우울한 홀로. 이 세계는 온종일 밝다. 그 안에서 웃는 사람은 우는 사람과 거의 동일하다 . 나의 병명을 아무도 모른다.

 

구현우, 하나의 몸이 둘의 마음을 앓는다

나는 너에게 다정해졌다

네가 너를 익명이라 소개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럴 때 과일은 노골적이다

좋아하는 색깔을 묻는다면
폭력적인 사람

너와 관련된 것은 개인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야한 사진을 요구하고 싶지만

너는 나를 바라보며 자세를 잡고

단호하게
난간에 올라서며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럴 때 꽃은 상투적이다

신체의 일부는 아쉽고
그렇다고 전신은 부족한데

익명의 네가 단단해진다

은유는 실패하고

나는 너에게 다정해졌다

 

최지인, 올바른 나체

[나는 벽에 붙어 잤다]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진은영,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기를 잃게 하오

당신은 시들었고 죽어가지만

내가 일부러 고통을 주려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난 죄책감을 느끼지 않소

내 생리가 그러하오

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기를 잃게 하오

내가 숨 쉴 때마다 당신은 무르익었고 급히 노화되었고 마침내 썩어버렸지만

 

지금도 몸에서 흘러나오는 호르몬을 억제할 수가 없소

나는 자살할 수 있는 식물이 아니오

당신한테 다가갈 수도 떠날 수도 없었소

단지 관심을 끌고 싶었소

 

김이듬, 정말 사과의 말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내게 금빛 은빛으로 수놓인
하늘의 천이 있다면,
밤과 낮과 어스름으로 물들인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허나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윌리엄 예이츠, 그는 하늘의 천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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