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없는 세상에서
저를 사랑하는 것보다 훌륭한 일을 위해서 태어난 그가 아닌가요

사실 그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행복을 느꼈다. 너무나도 행복에 가득 찬 듯해서 이제부터 나의 생각은 그녀의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미 그녀의 미소밖에는, 그리고 그렇게 그녀와 더불어 꽃이 늘어선 따사로운 오솔길을 그녀의 손을 잡고 거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

나는 평생 동안이라도 기다릴 만큼 너를 사랑해. 그렇지만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나의 사랑을 의심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나로서는 견딜 수 없어.

...

저를 사랑하는 것보다 훌륭한 일을 위해서 태어난 그가 아니옵니까? 그러하므로 그가 저로 인하여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저는 그만큼 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

지금 빨리 죽었으면 한다. 나 혼자라는 것을 또다시 알기 전에.

 

앙드레 지드, 좁은 문

영영 다른 곳에 닿을 것이다

제가 홀린 것들입니다.

내내 좋았으니,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으려 하고, 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려 한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 하고, 당신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서로 다르게 흐르고 있으니 영영 다른 곳에 닿을 것이다.

 

사랑의 총량은 한정되어 있는 것. 대체 불가능한 것. 사라지면 다시 없는 것. 그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용하고 남용한다. 미안해 대신 사랑해, 용서해 대신 사랑해, 싫어해 대신 사랑해, 그만해 대신 사랑해.

 

김박은경, 홀림증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내가 앉은 2층 창으로 지하철 공사 5ㅡ24 공구 건설현 장이 보였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몰인격한 내가 몰인격한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 당을 테두리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 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허연, 내 사랑은

[불온한 검은 피]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다시 많이 태어났는데도 외롭다고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김경미, 겹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한강,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잖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잖소. 9월의 빛나는 아름다움, 찬란함 말이오. 허공을 향해 손을 내미는 병자의 엷은 미소 말이오. 사실 그건 모든 투쟁의 본질 아니겠소, 선생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이런 말들이 갈수록 역겨워지기 시작한단 말이오.

 

이선욱,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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