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없는 세상에서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눈을 기다리고 있다

서랍을 열고

정말

눈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도 미래가 주어진 것이라면

그건 온전히 눈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왜 내가 잠든 후에 잠드는가

눈은 왜 내가 잠들어야 내리는 걸까

서랍을 안고 자면

여름에 접어 두었던 옷을 펴면

증오를 버리거나

부엌에 들어가 마른 싱크대에 물을 틀면

눈은 내게도 온전히 쌓일 수 있는 기체인가

당신은 내게도 머물 수 있는 기체인가

성에가 낀 유리창으로 향하는, 나의 침대 맡엔

내가 아주 희박해지면

내가 아주 희박해지면

누가 앉아 있을까

마지막 애인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내가 나중에 아주 희박해진다면

내가 나중에 아주 희미해진다면

화병에 단 한 번 꽃을 꽂아 둘 수 있다면

 

성동혁, 리시안셔스

아픈 시간들은 다 앓고 난 후 어디에 폐기되는 걸까?

길모퉁이에서 아니면 들판의 너른 이마 위에서 내 허파 위에서 초록 깻잎 위에서 아니면 밤새 수그리고 잠든 척 말이 없었을, 숨은 기다림 위에서 너를 한 번 이상 안았던 듯하다 나는 많은 색을 지나오느라 온몸이 울긋불긋해

물감들은 알루미늄 틀 안에 갇혀 어떤 형상으로 쏟아지길 기다릴까? 그건 어떤 기분일까? 발사되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지 기름 냄새를 피우며, 물감들은 물감이면서도 아직 색을 입지 못한 무형의 몸,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들은 초조한 꿈길을 걷는다 아니 꿈속에서조차 기다리느라 걷지 못한다 아픈 시간들은 다 앓고 난 후 어디에 폐기되는 걸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둠인지 알수도 없게 수상한 그늘

나는 너무 빨리 죽어서 환멸을 느낄 새도 없이 멀리
그저 멀리

오늘 비가 내렸고
어디 멀리서 한 사내가 짐승 소리를 내며 나를 잊고 있다고,
캄캄하게 넓어지는 그늘

 

박연준, 그늘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거야

지금까지 내가 해온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그러고 나서 남자는 화면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여자에게 하는 말이 너무 짧아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더 보탤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거야, 같은 말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공간연속체 속에서 그 모든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있는 중이었다.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사랑해, 죽여줘"

 몇 년 전, 제기동 거리엔 건조한 먼지들만 횡횡했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잠들어 있거나 취해 있거나 아니면 시궁창에 빠진 해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고......제대하여 복학한 늙은 학생들은 아무 여자하고나 장가가버리고 사학년 계집아이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약혼해버리고 착한 아이들은 알맞은 향기를 내뿜으며 시들어갔다.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우리의 노쇠한 혈관을 타고 그리움의 피는 흘렀다. 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술과 불이 우리를 불렀다. 향유 고래 울음 소리 같은 밤 기적이 울려퍼지고 개처럼 우리는 제기동 빈 거리를 헤맸다. 눈알을 한없이 굴리면서 꿈속에서도 행진해나갔다. 때로 골목마다에서 진짜 개들이 기총소사하듯 짖어대곤 했다. 그러나 197X년, 우리들 꿈의 오합지졸들이 제 아무리 집중사격을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의 총알은 언제나 절망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어느덧 방학이 오고 잠이 오고 깊은 눈이 왔을 때 제기동 거리는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로 진흙탕을 이루었고 우리는 잠 속에서도 "사랑해, 죽여줘"라고 잠꼬대를 했고 그때마다 마른 번개 사이로 그리움의 어머니는 야윈 팔을 치켜들고 나직히 말씀하셨다. "세상의 아들아 내 손이 비었구나, 너희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개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고요히 침을 흘리며 죽어갔다.
 

 

최승자, 197X년의 우리들의 사랑 - 아무도 그 시간의 火傷을 지우지 못했다

그날도 오후 두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그날도 오후 두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

 

이승희,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잘 자, 나는 오늘도 저물어가는 역사 속에서 당신을 사랑해

내가 당신의 인생을 기록하자면 

  문장이야 

 사람의 패망을 기록한 역사

잘자, 나는 오늘도 저물어가는 역사 속에서

당신을 사랑해

 

백가희, 우리의 우리

[당신이 빛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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