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없는 세상에서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다시 많이 태어났는데도 외롭다고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김경미, 겹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한강,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잖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잖소. 9월의 빛나는 아름다움, 찬란함 말이오. 허공을 향해 손을 내미는 병자의 엷은 미소 말이오. 사실 그건 모든 투쟁의 본질 아니겠소, 선생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이런 말들이 갈수록 역겨워지기 시작한단 말이오.

 

이선욱, 구원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믿을 수 있는 나무는 마루가 될 수 있다고 간호조무사 총정리 문제집을 베고 누운 미인이 말했다 마루는 걷고 싶은 결을 가졌고 나는 두세 시간 푹 끓은 백숙 자세로 엎드려 미인을 생각하느라 무릎이 아팠다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뜨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미인은 식당에서 다른 손님을 주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의 솜털은 어린 별 모양을 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은 밥을 먹다가도 꿈결인 양 씻은 봄날의 하늘로 번지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아둔 열(熱)들을 피하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던 것이었다

 

박준,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나의 병명을 아무도 모른다

나는 사랑을 유예한다. 잠든 사람이 반드시 꿈을 꿀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꿈을 꾸는 사람은 대부분  잠들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살아 있지도 않는 내가 잘사냐고 너에게 묻고 , 그러니 대답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 덜 아프다는 것이 나아졌다는 것으로 착각되는 일.  번화한 도시의 우울한 홀로. 이 세계는 온종일 밝다. 그 안에서 웃는 사람은 우는 사람과 거의 동일하다 . 나의 병명을 아무도 모른다.

 

구현우, 하나의 몸이 둘의 마음을 앓는다

나는 너에게 다정해졌다

네가 너를 익명이라 소개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럴 때 과일은 노골적이다

좋아하는 색깔을 묻는다면
폭력적인 사람

너와 관련된 것은 개인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야한 사진을 요구하고 싶지만

너는 나를 바라보며 자세를 잡고

단호하게
난간에 올라서며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럴 때 꽃은 상투적이다

신체의 일부는 아쉽고
그렇다고 전신은 부족한데

익명의 네가 단단해진다

은유는 실패하고

나는 너에게 다정해졌다

 

최지인, 올바른 나체

[나는 벽에 붙어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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